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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비망록

조상녀에 대한 기억



조상녀

  때는 녹내음이 물씬 흥기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아마 시험기간이었을까. 나는 그날도 역시 중앙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학교 식당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고(아마 해가 질 무렵이었지 싶다), 조금 걸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교정을 좀 거닐고 있었다. 시험기간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수업이 다 파해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학교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했었고 그래서 모처럼 걷는 교정의 풍경이 그날따라 내 눈에 더 각인 되었었나보다. 

  잠시 걷다가 목이 말라진 나는 공대 건물 쪽문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먹고 있었다. 어릇어릇 해가 저물고 있어서 하늘색이 좀 괴하게 변하고 있었다. 음. 황혼인가. 하고 홀짝홀짝 하고 있는데, 어떤 아낙이 저쪽에서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내 맞은편 벤치에 자리를 하는게 아닌가. 나는 뭔가 싶었는데 이내 다시 하늘로 눈을 돌리고서는 낯선 하늘의 색감을 감상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낙은 내쪽으로 자리하더니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시험기간이라 요새 힘들죠?"

  "하하. 뭐 그렇죠."

  "공부 잘 하게 생겼네요? 제 말이 맞죠?"

  "하하... 뭐..."

  뭐하자는 거지 이여자.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딱히 절세미인이라고 할 수 는 없었어도. 음 뭔가 단아하고 청조한 느낌이 풍겨오는 그런 외모랄까. 아무튼 나이는 이십대 중반 너머 30대 초반 사이. 그 어딘가 자리할 것 같아 보였다.

  "아. 다른게 아니라 제가 요즘에 공부하고 있는게 있거든요. 사람 관상보고 뭐 그런거 랄까요. 아무튼 제가 그래서 요즘에 사람들 관상을 보고 그러거든요. 근데 제가 봤을 때는, 아 참 학생 이름이 뭐라고 했죠?"

 "아 XXX요."

 "아~ XX학생 요새 뭔가 걱정이 있거나 그러진 않나요? 제 눈에는 그런게 보이네요."

 "그렇기야 뭐 그렇죠.. 하하"


조상녀2 (이어서)


  그당시 아무튼 나에게는 근심거리가 분명 있긴 있었다. 뭐 근심거리 안 갖고 살았던 적이 있었겠냐만은. 비릿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황혼따위 내쳐버리고 그녀와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다 쓰면 뭐가 되던간에 올라가지 않겠냐는 그런 마음이었을거다. 

  "지금 XX씨가 힘들고 그런거는 XX씨는 잘 모르겠지만 저 집안의 위쪽에 어떤 조상님이 계신대 그 분 때문에 그런거에요."

  나는 그냥 묵묵히 듣기로 했다. 과연 이 소피스트의 논증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탐구하는 기분으로 들어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나는 교양과목으로 논리학 수업을 듣고있었다.

  "제가 이 쪽으로 공부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 봤었어요. XX씨도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힘들어질 거예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나요?"

  "아.. 뭐.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하는건가요?"

  아. 이게 뭐 요새 유행한다는 그건가. 저녁도 소화시킬겸 나는 조금 더 눌러 앉아 보기로 했다. 나는 흥미를 가장했다. 그러자 그녀는 완전히 자신의 역할에 취해서 열연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한데. 제가 공부하는 곳에서 마침 다음주에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 있거든요. 이게 일 년에 딱 2번하는건데 마침 지금이 그 시기네요. XX씨는 운이 좋네요. XX씨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제사를 지내서 조상님들을 달래드려야해요. 어때요 생각 있으세요? 지금 안그래도 자리가 2자리 밖에 안남았거든요. XX시만 괜찮으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같이 가보는걸 권하는데.."

  "가면 뭐 준비해야 될 거라도?"

  "뭐 다른건 아니고.. 제사를 준비하는데 재료가 좀 들거든요. 그거 준비하는데 쓰이는 비용만 부담하시면 되요. 일단 저랑 같이 가보고 결정을 하는게 좋을거 같아요."

  "비용이라하면.. 대충 얼마정도 드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학생이라 조금 부담되실 수 도 있는데... 대략 300만원정도 들거예요."

  "300이라.. 어쨌든 그 제사를 지내기만하면 좀 나아진다는 그 말인가요?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100% 장담은 못 하더라도 지금까지 하셨던 분들은 다 좋은 결과가 있었어요. 그럼 XX씨 저랑 같이 가는 걸로 알고있어도 되는 건가요? 다음주 화요일날 시내에서 만나서 가는걸로 하죠. 여기 전화번호도 드릴게요"

  나는 건네는 쪽지를 받아들고는 보지도 않고 그냥 그자리에서 낄낄 웃으면서 북북 찢어버렸다. 순간 여자는 당황하더니 얼굴빛이 보랏빛이 되었다.
  
  "아! 근데 이만 가봐야 겠네요 시간이.. 공부도 해야되서. 하하. 아무튼 얘기는 잘 들었어요."

  여자는 어안이 벙벙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계단으로 내려가버렸다. 나는 그냥 갈까 하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 캔 뽑아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얘기하느라 목 많이 아프셨죠? 혼자 열심히 얘기하시는데 저만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네요. 하하.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하하. 이거라도 마시면서 가세요. 그럼 이만."

  여자는 실없이 웃더니 커피를 받아들고는 그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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